좀 지난일이긴 하지만.. 트럼프 당선일 이후 11월 8일부터 한 일주일간 제가 겪은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어디까지나 교육계, 학계, 대학가에 국한된 거지만, 트럼프 당선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에 대한 간략한 경험담입니다. 제 기억이 바래기 전에 여기 기록해두고 싶어서요.

1. 대학가

제가 있는 대학은 미국에서도 좀 빨갱이(?) 대학이라고들 하는데요, 맑스주의 경제학의 학맥을 잇고 있기도 하고, 커뮤니케이션도 비판커뮤니케이션 중심이고, 인문사회과학 쪽은 확실히 좀 그렇긴 합니다. 마을 대부분 인구가 근처에 위치한 5개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나 교직원이라, 진보적인 분위기가 많이 형성되어 있어요. 온통 샌더스 지지자 투성이에다가 무지개깃발 걸린 교회도 있고 ㅎㅎ 

1) Support Letters

8일 새벽부터 학과장의 비탄 섞인 이메일이 날아왔고 ("Deep, deep sadness.. I am afraid of what this country is heading to.."), 교직원 노조, 대학원생 노조, 학교 총장, 그리고 애들 다니는 유치원 원장, 등으로부터 이메일이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용은, "선거 기간 내내 차별/혐오 발언이 난무했고, 트럼프 당선으로 인해서 다들 걱정하는 거 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어떤 인종/젠더/성정체성/시민권 등에 의한 차별에 반대한다" 는 것이었고요. 

"Following the recent U.S. election, we are aware that many international students and scholars are concerned about their immigration status.  Rest assured that all of us at XXX University are proud of and committed to being a diverse and welcoming community for students from all over the world. You are important to us and we are here to support you." 

어떤 메일은, 아래와 같이 직접적으로 이민자 문제를 대통령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With regard to concerns about potential changes in immigration law, including employment status for non-immigrants, you should be aware that the executive branch (the president) is only one of three branches of the U.S. government. The other two are the legislature (which actually puts into effect and passes laws like immigration law) and the judiciary (which determines the constitutionality of laws passed by the legislature). The president can propose laws to the legislature, but he or she cannot enact law." 

2) sanctuary campus: https://en.wikipedia.org/wiki/Sanctuary_campus

간단히 말씀드리면, 선거 이후에 대학생들이 조직한 캠페인인데요, 학교 본관 앞을 점거하거나 캠퍼스를 행진하면서 "우리 학교를 서류미비자/불법체류자 학생들을 위한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라" 고 학교측을 압박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민국 사람이 학교에 맘대로 들어와서 불체자 학생을 못잡아가요. 저도 여기 참여했고요, 며칠 뒤에 총장이 전체이메일 보내서 승인했습니다. 미국 내에서 여전히 퍼져가고 있는 캠페인입니다.

2. 교육계/학계

저희 대학원 내에서 가장 많이 화제에 올랐던 것은, "아.. 수업 들어가서 학부생들한테 선거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애들이 선거에 관련해서 토론을 하고싶어하거나 코멘트를 요청하면 뭐라고 해야 하지" 입니다.  이에 관련한 교육/학습자료들을 서로 공유하고 그러면서 또 사람들끼리 토론하고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trump curriculum: http://www.publicbooks.org/fea...

백인우월주의, 흑인민권운동, 멕시칸 이민사, 여성혐오 등의 주제와 함께 트럼프의 당선을 설명하고 미국 사회를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짜로' 수업 계획서 형식으로 자료를 모으고 또 토론하는 곳입니다. 

탈진실 (post-truth) 에 대한 학회도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탈진실과 트럼프 당선에 관련해서는 이 기사가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 같아서 링크합니다. https://1boon.kakao.com/slowne... 

3. 우울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 친구가 다니는 대학에서는, 이슬람계 여학생 (히잡을 쓰고 다님)이 학장에게 이메일을 써서, "트럼프 당선 다음날 수업에 들어갔더니, 백인 남학생이 트럼프 사진이 박힌 티셔츠를 입고 자신을 계속 쳐다보았다. 나는 위협을 느꼈고, 이런 분위기에서 수업받을 수 없다. 걔랑 다른 수업 들을 수 있게 조치해달라."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 학부모들 중에 세계 각지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은데요, 그 분들이 초등학생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게 생각납니다. 아이들이 "엄마, 나는 여기서 환영받을 수 없는 사람이야?" 라고 물었다던지, 백인 가정 출신의 같은 반 친구가 "트럼프는 좋은 대통령이 될거라고 우리 아빠가 그랬어" 라고 했을 때 아이들이 느끼는 혼란감, 부모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답해줘야 할지에 대한 고민...

학교에서 간담회도 열렸는데, 이곳 선생님들의 대답은 단호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너는 환영받는 존재다, 차별은 없다, 기회는 공평하다, 등 이런 말씀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건 거짓말이니까요. 아이들에게, 차별이 존재하지만 옳지 않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고, 그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다고 말해주세요" 

이 정도만 쓰겠습니다. 고등학교 선생님, 대학 교수, 총장, 유치원 선생님 등 다양한 교육계 종사자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공개 이메일 형식으로 드러내고, 문제를 공유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촛불시위조차 '정치적'으로 몰려 손가락질받을까봐 조심조심해야 하는데 말이죠. 

달리
미국 내에 이런 흐름으로 시민 반응이 모이고 있군요. 소식 감사합니다. 한국에도 시절이 많이 변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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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
감사합니다.
덕분에 '탈진실'이라는 개념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흥미진진하면서도 위험해보이네요. 두려움이 느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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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atus
저는 트럼프 커리큘럼에 눈길이 가는군요. 이른바 책 덕후들이 시사 주제를 가지고 도움되는 책을 리뷰하는 사이트인 것 같은데요. (물론 책만 다루는 것은 아니네요) 우리나라도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데 좀 더 넓고 깊은 시야를 제공할 수 있는 매체도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저런 커리큘럼을 시민교육 공간이나 공교육에서 선생님들이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구요.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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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naruhodo
네. 트럼프 커리큘럼은 학계 사람들이 학술서와 대중서, 논문, 신문기사, 트윗 등 SNS, 등 다양한 매체를 수업자료로 해서 트럼프가 미국 정치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읽고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나온 가짜 '수업계획서' 에요. 트럼프를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현상으로 보는 것이고, 그의 인기몰이가 일시적인 또는 급작스럽게 튀어나온 일탈적 현상이 아니고 미국 정치, 경제, 문화의 변화 지형속에서 등장하게 된 역사적 현상으로 읽어보자는 것인데요, 정치학, 교육학, 커뮤니케이션 등 분야별로 있어요. 위키 형식으로 누가 올리면 사람들이 강의 자료를 덧붙이거나 빼거나 하면서 만들어가는데, 그 과정도 토론거리가 돼요. 예를 들어, 탈식민주의 운동사에 대한 논문들을 누가 뽑아 올렸는데, 사람들이 "탈식민주의 얘기를 하면서 어째 니가 뽑아논 논문들이 죄다 백인 남성들에 의해 쓰여진 것 뿐이냐, 흑인, 여성 학자들이 분야에서 쌓아올린 업적이 얼만데!" 이런 식으로요. 저도 conatus 님처럼 이런 온라인 작업이 학계와 교육 현장에서 깊이있는 토론을 유도하는 데 유용하다고 생각해요. 개별 신문 기사들이나 시사저널 등에서 다루기엔 벅차고 독자층도 얇아서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모이고 부딪힐 만한 공간 제공이 어려우니까요. 박근혜 탄핵 커리큘럼 같은게 생긴다면, "우연히 측근 비리 증거가 엄청 발견되는 바람에 사람들이 촛불집회를 통해 압박을 넣어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다" 라고 표면만 겨우 짚은 수준이 아니라, 산업화와 박정희 신화, 세대갈등, 국민-시민-국가의 관계 재정립, 시민 운동사, 미디어를 통한 정치 참여, 페미니즘 등 여러 주제를 통해서, 역사적 변화와 현재의 의미가 어떻게 맞닿는지 사람들의 생각이 모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과거의 중요했던 기록들-책이든 논문이든 기사든-을 다시 살려내서 현재적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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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한국도 세월호 커리큘럼, 국정농단 커리큘럼 등등 이런걸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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